NFAJ 컬렉션으로 보는 일본 영화의 역사
국립영화아카이브 전시실 상설전

●기획 전시 운영 기간에 맞춰 개관합니다.

Leaflet
장소
국립영화아카이브 전시실 (7층)
관람시간
오전 11시~오후 6시 30분 (오후 6시에 입장 마감)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은 오전 11시~오후 8시 (오후 7시 30분에 입장 마감)
휴관일
월요일, 기획 전시 설치 기간, 연말연시
관람요
일반 250엔 (단체 200엔) / 대학생 130엔 (단체 60엔)
*65세 이상, 고등학생 및 18세 미만, 장애인과 동반자 1인까지 무료로 관람 가능합니다.
*국립영화아카이브의 상영 티켓 혹은 온라인 티켓 구매 이메일을 보여주시면, 단체 요금이 적용됩니다.
*5월 18일 ‘국제박물관의 날’은 무료로 관람 가능합니다.

한 세기가 넘는 역사와 두 번의 황금기를 거쳐온 일본 영화.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세대의 관객을 대상으로 한 본 전시회에서는 포스터, 스틸 사진, 영화 제작용 장치 및 장비 그리고 유명 영화인의 개인 물품 등, NFAJ 컬렉션을 통해 일본 영화의 역사를 알아봅니다.

*일본어, 영어, 중국어와 한국어 캡션 지원

전시품 목록

범례

  • 본 리스트의 기재 순서와 전시실 내의 배열 순서는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 모든 전시품은 국립영화아카이브의 소장 자료입니다.
  • 전시품은 불가피하게 변경되는 경우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제1장 일본 영화의 시작: 영화전사~1910년대

16mm 영사기

란드에서 가져온 환등(매직랜턴)을 가메야 도라쿠亀屋都楽가 응용하여 「그림자 연극写し絵」으로 에도에서 흥행시킨 것은 에도 후기인 교와享和1803년이었습니다. 「그림자 연극」은 간사이에서는 「니시키 그림자 연극錦影絵」이라고도 하며 일본 각지에 퍼졌는데, 그 상연 형태는 샤미센이나 북 등의 타악기와 설경 조루리[불경을 이야기하는 조루리説教浄瑠璃], 기다유부시義太夫節등의 이야기가 결부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시각 미디어와 이야기의 관계는 나중에 일본 영화의 독자적 존재인 ‘활동 변사活動弁士’까지 이어집니다. 메이지明治기에는 서양의 새로운 지식을 계몽할 목적으로 문부성이 중심이 되어 다시 ‘서양환등西洋幻燈’이 교육에 이용되었습니다.

그리고 1896년부터 1897년에 걸쳐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발명된 영화가 차례차례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당시에 ‘활동사진’이라고 불리던 영화는 점차 신기한 볼거리라는 지위에서 벗어나 일본제 작품도 만들어지게 되었고, 전문 상영관도 보급되어 대중오락의 중심을 차지했습니다. 1912년에는 지금까지 4개사였던 영화업자가 ‘닛카쓰日活’로 통합되어 산업 형태도 정비되었습니다. 교토의 촬영소에서는 일본 최초의 스타 오노에 마쓰노스케尾上松之助의 ‘구극旧劇’(구파旧派)영화가 인기를 끌었고 도쿄의 무카이지마向島에 있었던 촬영소에서는 가부키처럼 여성 역할을 여형女形이 연기하는 ‘신파新派’영화가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작품은 촬영기 조작에 의한 트릭촬영 등은 있었지만 아직 영화만의 독자적인 표현 기법은 충분히 사용되지 않은 채 연기하는 모습을 그대로 촬영했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파’나 ‘신파’도 후일 ‘시대극’이나 ‘현대극’이라고 불리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영화의 전래

  • “메이지 시대의 일본”(1897-99년, 콩스탕 지렐, 가브리엘 베이르, 시바타 쓰네키치 촬영) 상영 시간: 약 22분
  • 스즈키 시게요시 감독이 루이 뤼미에르로부터 받은 시네마토그래프 오리지널 필름(1927년)
  • 루이 뤼미에르와 나카다 슌조(1931년)
  • 도톤보리 가도자 극장 “천연색 활동 대사진”(1903년) 포스터
  • “VITASCOPE 활동 대사진”(1899년경) 포스터
  • “간다 긴키칸 활동 대사진 그림”(1897년)
  • “우쓰시에”의 오리지널 종판/공연 기구
모미지가리(단풍구경)

“모미지가리(단풍구경)”(1899년 시바타 쓰네키치 촬영) 상영 시간: 약 6분

영화산업의 시작

  • 파테 프로페셔널 촬영기
  • 요시자와 상점 메구로 촬영소 글라스 스테이지에서의 촬영 풍경
  • ‘환등기계, 영화 활동사진기계 및 부속품 정가표’(1909년)
  • 잡지 “활동사진계” 제21호(1911년)
  • 바이오스코프 촬영기
  • M 파테 상회 ‘다이즈미 야스나오 남극탐험 출발기념’ 사진(1911년)
  • “일본 남극 탐험”(1912년, 다이즈미 야스나오 촬영) 상영 시간: 약 3분
  • M 파테 상회 특약 ‘반초 엔게이칸’ 프로그램
  • 간다 긴키칸 “한국 일주”(1908년) 전단지
  • 간다 긴키칸(1907년경)
  • 교바시 제1 후쿠호칸 “지고마” 프로그램(1911년)
  • 요쓰야 제4 후쿠호칸 프로그램(1911년)
  • “탐정소설 지고마”(1915년)
닛카쓰의 창립

  • “카츄샤”(1919년, 다나카 에이조 감독) 포스터
  • “아침해가 뜨기 전에”(1920년, 다나카 에이조 감독) 스틸 사진
  • 잡지 “무코지마” 창간호(1923년)
  • 여성역 시대의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그림엽서
  • 사토 엔지 사진과 그가 애용했던 실크모자
덴카쓰와 곳카쓰

  • 윌리엄슨식 일본제 촬영기
  • 가쓰라다 아미가사 각색 대본
    • “충효 미담 미야지마 복수 겐나 3용사”(1915년)
    • “닌자를 이긴 덴도 진리키마루”(1917년)
  • “고로 마사무네 효자전”(1915년, 요시노 지로 감독) 상영 시간: 약 6분
  • “구극 마사무네 효자전” 설명 대본
  • 사와무라 시로고로 사진
  • 곳카쓰 영화 관련 문서
    • ‘곳카쓰 촬영소 및 도구 창고 건축 공사 일체에 관한 청구서” 등(1920년)
    • ‘촬영과 직원 전체 봉급 예산’
    • “알프스의 꽃”/“야마코이시” 예산표(1920년)
    • “쓰미노 옷토” 의상 명세서(1920년)
  • “겨울 동백”(1921년, 하타나카 료하 감독) 상영 시간: 약 6분
최초의 스타, 오노에 마쓰노스케

  • “주신구라”(1910-12년, 마키노 쇼조 감독) 상영 시간: 약 4분
  • “이와미 주타로”(1917년) 포스터
  • 오노에 마쓰노스케 그림엽서(1914-16년)
    • “니혼 긴지”(1914년, 마키노 쇼조 감독)
    • “라이메이 로쿠로”(1915년, 마키노 쇼조 감독)
    • “후카쿠사 모노가타리(이시이 겐파치로)”(1915년, 마키노 쇼조 감독)
    • “오마에다 에이고로”(1915년, 쓰지 기치로 감독)
    • “고마쓰 아라시”(1915년)
    • “가이소덴”(1915년, 마키노 쇼조 감독)
    • “가미나리몬 다이카 지조메노 마토이”(1916년)
  • 아사쿠사 후지칸 “아라키 마타에몬”(1925년, 이케다 도미야스 감독) 전단지
마키노 쇼조와 마키노 프로덕션

  • 마키노 쇼조 사진
  • 스즈키타 로쿠헤이 친필 대본
    • “에도 괴도전 그림자 법사”(1925년, 후타가와 분타로 감독, 반도 쓰마사부로 주연)
    • “어느 양반의 이야기”(니즈마 잇페이타 명의, 1925년, 후타가와 분타로 감독, 나카네 류타로 주연)
    • “호검 시미즈 잇카쿠”(1929년, 후타가와 분타로 감독, 다니자키 주로 주연)
  • “실록 주신구라”(1928년, 마키노 쇼조 감독) 기념 앨범
  • “고이야마비코”(1937년) 촬영 스냅 사진
  • “로닌가이 제1부 아름다운 사냥감”(1928년, 마키노 마사히로 감독) 스틸 사진
초기 영화 및 유명 변사의 영화 설명집 [16mm 영사기 상영]

“일본영화사 제1부/제2부”(1941년, 오타 고이치 구성, 마쓰이 스이세이 설명)에서
상영시간: 약 8분

  • “니오노 우키스” (1900년, 쓰치야 조지 촬영, 초대 나카무라 간지로 출연)
  • “소쩍새” (제작연대 미상, 야마자키 조노스케 출연)
  • 연쇄극 “아이가사” (제작연대 미상)
  • “독류” (미국, 1916년, 로이스 웨버 감독, 이코마 라이유 설명)
  • “환각의 여자” (1920년, 가에리야마 노리마사 감독)
  • “우미인초” (1921년, 고타니 헨리 감독, 구리시마 스미코 출연)
  •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독일, 1920년, 로베르트 비네 감독, 도쿠가와 무세이 설명)
  • “사공의 노래” (1923년, 이케다 요시노무 감독, 구리시마 스미코 출연)

제2장 무성영화의 황금시대: 1920년대

1910년대 말이 되면 ‘애활가愛活家’(활동사진 애호가)라고 불리는 구미영화를 좋아하는 팬들이 일본 영화의 발달되지 못하고 정체된 모습을 지적했고, 가에리야마 노리마사帰山教正 등을 필두로 일본 영화를 근대화시키려고 하는 ‘순영화극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영상만으로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도록 설명자막이나 대화 자막을 삽입하여 활동 변사의 이야기에 좌우되지 않는 영화의 자립을 주장하는 한편 클로즈업에도 견딜 수 있도록 여형을 폐지하고 여배우 채용을 실현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노포였던 닛카쓰에서는 다나카 에이조田中栄三 감독 작품에 영향을 미쳤으며, 다이쇼가쓰에이大正活映나 쇼치쿠키네마松竹キネマ라는 새로운 회사의 설립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간토関東대지진(1923년)을 기점으로 영화적인 템포가 더 요구되었고, 예전의 연극 형태에 얽매이지 않는 영화스타의 등장으로 활극 영화나 희극영화가 융성했습니다. 명랑한 미국영화의 영향을 반영한 도회적인 청춘영화가 인기를 모으는 한편, 시대극 분야에서는 허무주의적 반역 정신을 가진 영웅이 굉장한 칼싸움을 보여주는 검극剣戟영화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고발하는 ‘경향영화傾向映画’도 만들어져 군집장면을 몽타주로 보이는 등 위력을 발휘했지만, 그 반면 국가에 의한 검열도 강화되었습니다.

순영화극 운동

  • 가에리야마 노리마사 사진
  • “인생의 빛”(1919년, 가에리야마 노리마사 감독) 스틸 사진
  • “아버지, 어디에”(1923년, 가에리야마 노리마사 감독) 촬영 대본
  • 구리하라 토마스 사진
  • “가쓰시카 스나고”(1920년, 구리하라 토마스 감독) 스틸 사진
  • “히나마쓰리 축제의 밤”(1921년, 구리하라 토마스 감독) 촬영 스냅 사진
  • “지요다 주보” 제26호(1920년)
    잡지 “무비 THE MOVIE” 창간호(1921년)
  • “나리킨”(1918년경, 구리하라 토마스=해리 윌리엄스 감독) 상영 시간: 약 6분
  • “노상의 영혼”(1921년, 무라타 미노루 감독) 스틸 사진
  • 도톤보리 가도자 극장/신쿄고쿠 가부키자 극장 “노상의 영혼” 프로그램(1921년)
  • 무라타 미노루 사진
  • 우시하라 기요히코 사진
  • 구리시마 스미코 초상화, 그림엽서, 브로마이드
  • 잡지 “가마타” 창간호(1922년)
    잡지 “가마타 화보” 창간호(1923년)
“변사 시대”

  • “스코부루 히조 대박사 고마다 고요 변사 공연”(1904년경) 포스터
  • “전국 활동사진 변사 인기 순위” 제8집(1917년)
  • 아사쿠사 전기관 “제2회 사자후 변사대회” 프로그램(1920년)
    아사쿠사 키네마 클럽 “제4회 사자후 변사대회” 프로그램(1922년)
  • 도쿠가와 무세이 사진
  • 잡지 “웃음의 왕국” 창간호/신년호(1933-34년)
기록영화와 뉴스영화

  • “간토 대지진 대화재 실황”(1923년, 시라이 시게루 촬영) 상영 시간: 약 6분
  • 이케부쿠로 헤이와칸 “이재민 위안 활동사진”(1923년) 전단지
    혼고 고마고메칸 “닥터 마부제/도쿄 대지진 대화재 실사”(1923년) 전단지
  • 애클리 촬영기
  • “구로베 협곡 탐험”(1927년, 시라이 시게루 촬영) 촬영 스냅
  • 아이모 촬영기
  • “아사히 세계뉴스”의 카메라맨 기념 사진(1936년)
파르보 카메라

  • 파르보 L형 촬영기
  • 기누가사 데이노스케와 파르보(1937년, 기무라 이헤이 촬영)
“미친 한 페이지”와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 “미친 한 페이지”(1926년,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 상영 시간: 약 5분
  • “미친 한 페이지” 각본 원고 및 촬영 메모
  • “미친 한 페이지” 그림엽서/사진
  • “유키노조 헨게”(1935년,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 포스터
“주지의 여행일기”와 이토 다이스케

  • “주지 여행기”(1927년, 이토 다이스케 감독) 상영 시간: 약 7분
  • “속 오오카 세이단 – 마상해결편”(1931년, 이토 다이스케 감독) 촬영 스냅
  • 이토 다이스케에게 보낸 엽서(1934년)
6인의 시대극 스타

  • 오코치 덴지로 “단게 사젠 제1편”(1933년, 이토 다이스케 감독) 포스터
  • 오코치 덴지로 표지 “후지 주보” 제155호, 제168호, 제192호(1930-31년)
  • 반도 쓰마사부로 “무명지옥”(1926년, 리쿠 다이조 감독) 포스터
  • 반도 쓰마사부로 “자간”(1926년, 시바 세이카 감독) 포스터
  • 반도 쓰마사부로 그림엽서집 “쓰마사부로 일파” A·B
    그림엽서 “라쿠요 우에유”(1931년, 아즈마 다카시 감독)
  • 아라시 간주로 “구라마텐구”(1928년, 야마구치 뎃페이 감독) 포스터
  • 아라시 간주로 브로마이드와 “마키노 영화 입사 인사”(1927년)
  • 이치카와 우타에몬 “조콘” 포스터(1927년, 오시모토 시치노스케 감독)
  • 잡지 “우타에몬 영화” 제2권 제1호(1928년)
  • 가타오카 지에조 “천하태평기”(1933년, 이나가키 히로시 감독) 포스터
  • 가타오카 지에조 “마키노 영화 입사 인사”(1927년)
  • 잡지 “지에조 영화” 창간호(1929년)
  • 하야시 조지로 “난군”(1927년, 이누즈카 미노루 감독) 포스터
  • 하야시 조지로/하세가와 가즈오 브로마이드
    “유키노조 헨게”(1935년,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 스틸 사진(동시 2역)
데이코쿠 키네마

  • “충효의담”(1928년, 이시야마 미노루 감독)과 “충복 나오스케”(1928년, 와타나베 신타로 감독) 포스터
  • “선풍시대”(1930년, 시바 세이카 감독) 포스터
소형 영화와 완구 영화

  • 오기노 시게지 구 소장 파테 베이비 9.5mm 촬영기
  • 오기노 시게지 구 소장 파테 베이비 9.5mm 영사기
  • “AN EXPRESSION(표현)”(1935년, 오기노 시게지 감독) 상영 시간: 약 3분
  • 잡지 “일본 파테시네” 1932년 1월호
  • “잔진잔바켄(말을 참수하는 검객)”(1929년, 이토 다이스케 감독) 상영 시간: 약 5분
  • 라이온 수동식 35mm 영사기
  • 레프시 종이 필름
    • “보석상자”(1936년)
      “노라쿠로 반자이”(1937년)
프로키노

  • “프로키노 제3회 공개” 프로그램(1930년)
  • 잡지 “프로키노” 창간호(1931년)

제3장 토키 혁명으로: 1930년대

영화에 소리를 넣으려는 시도는 영화사 초창기부터 시도되어 왔는데, 1927년에 미국에서 〈재즈 싱어〉가 공개되어 세계 영화계는 한순간에 토키 영화 시대로 돌입했습니다. 사일런트 영화(무성영화)는 주로 수동카메라로 촬영되었지만, 필름에 소리를 넣게 되면서 1초 동안 24프레임이라는 일정한 속도의 촬영이 필요했으며, 또한 녹음 기재의 정비나 토키 영사기 설치 등 영화산업의 대규모화가 요구되었습니다.

국산 토키 영화도 쇼치쿠의 〈마담과 아내マダムと女房〉(1931년)의 성공으로 궤도에 올랐으며, P.C.L.(도호東宝의 전신)에서는 〈음악 희극 취하는 인생音楽喜劇 ほろよひ人生〉(1933년)을 비롯한 뮤지컬영화가 왕성하게 만들어졌습니다. 무성영화가 영상을 주체로 하는 시적이고 서정적인 표현에 치우쳐져 있었다면, 현실의 소리가 반영되는 토키에서는 보다 리얼한 표현이 중시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무렵에 쇼치쿠의 가마타촬영소蒲田撮影所에서는 소장인 기도 시로城戸四郎의 방침도 있어서 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을 그린 ‘소시민영화’가 특색이 되었고, 시마즈 야스지로島津保次郎가 발 빠르게 토키 기법을 완성했습니다. 또한 시대극 영화에서도 검극 중심의 작품에서 시작하여, 등신대의 인물을 그린 ‘일본식 상투를 튼 현대극’이라고 불린 작품을 이타미 만사쿠伊丹万作나 야마나카 사다오山中貞雄가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는 〈기온의 자매祇園の姉妹〉(1936년) 등에서 간사이 지역 방언을 사용하는 등 자신만의 리얼리즘표현을 심화시켰습니다.

스즈키 주키치

  •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하게 했는가”(1930년, 스즈키 주키치 감독) 포스터
  • 이스트폰 디스크 “자장가”(1930년)
  • “자장가”(1930년, 스즈키 주키 감독) 포스터
  • “자장가” 스틸 사진
토키 시대가 도래하다

  • “후지와라 요시에의 고향”(1930년, 미조구치 겐지 감독) 상영 시간: 약 1분
  • “후지와라 요시에의 고향” 포스터
  • “마담과 아내”(1931년, 고쇼 헤이노스케 감독) 스틸 사진
  • “마담과 아내” 전단지
  • “옆집의 잡음” 촬영 대본(1931년)
쇼치쿠 모더니즘

  • 고쇼 헤이노스케 사진
  • 고쇼 헤이노스케 승진 발령
  • “메이지 하루아키”(1968년, 고쇼 헤이노스케 감독) 고쇼 헤이노스케 꼭두각시 인형
  • “옆집 야에짱”(1934년, 시마즈 야스지로 감독) 포스터
  • “바람 속의 아이들”(1937년, 시미즈 히로시 감독) 포스터
다나카 기누요

  • 다나카 기누요 브로마이드
  • “인생의 짐”(1935년, 고쇼 헤이노스케 감독) 포스터
  • 다나카 기누요 애용 문구
오즈 야스지로

  • 오즈 야스지로 스냅 사진
  • “숙녀는 무엇을 잊었는가”(1937년, 오즈 야스지로 감독) 포스터
  • “동경 이야기”(1953년, 오즈 야스지로 감독) 포스터
  • “동경 이야기” 촬영 대본
닛카쓰 다마가와 스튜디오

  • “무한한 전진”(1937년, 우치다 도무 감독) 포스터
  • “흙”(1939년, 우치다 도무 감독) 스틸 사진
  • “흙” 촬영 스냅
  • “흙”(1939년) 러시 필름 상영 시간: 약 5분
  • 우치다 도무가 직접 만든 펜 접시
  • 고스기 이사무 사진
  • “흙과 군인”(1939년, 다사카 도모타카 감독) 현지 촬영 기념 단체 메시지
  • “흙과 군인” 스틸 사진/촬영 스냅
  • 긴자 극장 “흙과 군인” 프로그램
일본영화감독협회

  • “일본영화감독협회 창립 취지서” 및 인사장(1936년)
  • 기누가사 데이노스케에게 보낸 편지(1936년)
  • ‘일본영화감독협회 창립 모임’ 기념 사진(1936년)
P.C.L.에서 도호로

  • 도호 영화의 설립 통지 문서(1937년)
  • “젊은 사람”(1937년, 도요다 시로 감독) 포스터
  • 에노모토 겐이치 주연 “돈구리 돈베에”(1936년, 야마모토 가지로 감독) 포스터
  • 후루카와 롯파 주연 “돗칸 에키초”(1945년, 사이토 도라지로 감독) 포스터
  • “하와이/말레이 앞바다 해전”(1942년, 야마모토 가지로 감독) 사진첩
야마나카 사다오

  • 야마나카 사다오 사진
  • 야마나카 사다오 추모비 탁본
  • “인정 종이풍선”(1937년,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 스틸 사진
가와이 영화/다이토 영화

  • “히라이 곤파치”(1928년, 오카 고지 감독) 포스터
  • “히노쿠루마 오만”(1928년, 소네 준조 감독) 포스터
  • 잡지 “다이토 영화”(1936년)
  • ‘다이토 영화 스틸 앨범’

제4장 전시하의 일본 영화: 1930년대 후반~1945년

19세기 말에 탄생한 영화는 ‘전쟁의 세기’라고 하는 20세기에 근대전과 함께 성장해 왔다는 역사도 짊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영화도 러일전쟁의 종군 기록을 촬영하는 단계에서 첫 약진기를 맞이했으며, 만주사변을 거쳐 중일전쟁이 본격화된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전쟁 수행을 긍정하는 프로파간다 미디어로서 더욱더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외국인이 만든 일본을 소개하는 영화의 잘못된 이미지를 시정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국수적인 ‘영화 국책’ 움직임은 1939년의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 법에는 영화인 등록제나 각본의 사전검열, 문화영화나 뉴스영화의 강제 상영, 외국영화 제한 등이 명문화되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필름 등 군사물자로 전용할 수 있는 자재를 통제할 필요에서 닛카쓰, 신코키네마新興キネマ, 다이토大都영화가 통합되어 새로운 회사인 다이에이大映가 탄생했습니다. 또한 일본이 이미 지배하고 있던 대만, 조선, 중국 대륙 등에서 태평양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동남아시아로 확대된 식민지 민중의 마음을 장악하기 위한 첨병으로서도 영화는 활용되었습니다.

일본산 영사기

  • 고미쓰 공업제 영사기 헤드 머신 로얄 H형
  • 롤라 영사기 사운드 헤드
  • 마쓰다제 영사기 램프 하우스
  • 고미쓰 공업제 영사기 스탠드
영화 통제와 영화법

  • 내무성 영화 검열 검인
  • “활동사진필름 검열시보 다이쇼 15년도” 원본(1926년)과 ‘검열 카드’
  • “오사카 엘레지”(1936년, 미조구치 겐지 감독) 내무성 검열 인가 대본
  • 그림으로 보는 ‘영화법’(1939년)
  • “일본뉴스 제78호”(1941년) 포스터
  • “승리의 날까지”(1945년, 나루세 미키오 감독) 포스터
  • “일본 영화배우 명감 쇼와 18년 후기판”(1943년)
식민지와 영화

  • 아스카니아 촬영기
  • “냔냔 먀오호이”(1940년, 아쿠타가와 고조 편집) 촬영 스냅
  • “지나사변 후방 기록 상하이”(1938년, 가메이 후미오 감독) 포스터
  • 잡지 “만주영화” 창간호 일문판/만문판(1937년)
    통신 “화영통신” 제1호(1943년)
  • 이향란 초상화와 “밀월 특급열차”(1938년, 우에노 신지 감독) 스틸 사진
  • “만세류방”(1942년, 복만창 외 감독) 포스터
  • 이무라 다다시 구 소장 “난카이노 하나타바”(1942년, 아베 유타카 감독) 앨범

제5장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황금시대: 1945년~1950년대

패전과 점령기를 거쳐 일본이 황폐한 사회의 재생을 지향했던 1950년대에는 영화산업도 그런 새로운 분위기에 맞게 발전했고, 또한 사람들의 부흥에 대한 노력을 고무시키기라도 하듯이 ‘오락의 왕’이라는 지위를 구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라쇼몽羅生門〉(1950년)이 베네치아국제영화제 금사자상을 수상한 일이 상징하듯이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미조구치 겐지 등의 작품이 세계의 주목을 받은 예술적 영광의 시대면서, 국내에서도 1958년에 영화의 연간 관객 수가 사상 최고인 11억 2천745만 명을 기록했고, 1960년대에는 연간 제작 편수가 극영화만으로도 547편, 영화관 수가 7,457개 관에 달하는 등 영화산업이 일찍이 없었던 호황을 누리던 시대였습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쇼치쿠, 도호, 다이에이, 닛카쓰, 신도호新東宝라는 대형 6개사(1961년의 신도호 도산 이후에는 5개사)가 각각 제작, 배급, 흥행이라는 영화 유통의 모든 공정을 관리하여 전국 방방곡곡의 극장에 필름을 주는 시스템의 완성이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의 일본 영화는 국산 영화의 컬러장편 극영화〈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カルメン故郷に帰る〉(1951년)를 비롯한 색채영화 시대의 도래나 〈고질라ゴジラ〉(1954년)등에서의 특수촬영 기술의 심화 등 기술 면의 현저한 발전에서도 그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미첼 NC형 촬영기

미첼 NC형 촬영기

나토코 영사기

나토코 16mm 사운드 영사기

구로사와 아키라

  • 모토키 소지로 구 소장 “라쇼몽”(1950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촬영 대본
  • 모토키 소지로 구 소장 “라쇼몽”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트로피(1951년)
  • “라쇼몽” 포스터
  • 모토키 소지로 구 소장 “생존의 기록”(1955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제목 선정안 문서
  • 무라키 시노부 “도데스카덴”(1970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의상 데생
  • 시무라 다카시 구 소장 “이키루”(1952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앨범
미조구치 겐지/미즈타니 히로시 컬렉션

  • “오하루의 일생”(1952년, 미조구치 겐지 감독) 포스터
  • 미즈타니 히로시 “신 헤이케 이야기”(1955년, 미조구치 겐지 감독) 세트 디자인
  • 미즈타니 히로시 “신 헤이케 이야기” 의상 디자인
  • 미조구치 겐지 데스 마스크
  •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미조구치 겐지 데스 마스크를 기증하는 미즈타니 히로시
  • 미즈타니 히로시 데스 마스크
  • “지카마쓰 이야기”(1954년, 미조구치 겐지 감독) 앨범
나루세 미키오

  • 주코 사토루 “산의 소리”(1954년, 나루세 미키오 감독) 세트 디자인
  • “엄마”(1952년, 나루세 미키오 감독) 앨범
최초의 컬러영화와 기노시타 게이스케

  • “카르멘 고향으로 돌아가다”(1951년, 기노시타 게이스케 감독) 포스터
  • “카르멘 고향으로 돌아가다” 컬러 필름 책갈피
코니컬러 시스템

  • 코니 컬러(모노플렌 멀티 이미지 원샷) 카메라 101호기(1953년)
  • “미도리 하루카니”(1955년, 이노우에 우메쓰구 감독) 촬영 스냅
특수촬영

  • “고질라”(1954년, 혼다 이시로 감독) 포스터
  • 다이에이 “스크린 프로세스 테스트의 기록”(1953년)
독립 프로덕션 영화 운동

  • “탁한 강”(1953년, 이마이 다다시 감독) 포스터
  • “히메유리의 탑”(1953년, 이마이 다다시 감독) 앨범
  • “진공 지대”(1952년, 야마모토 사쓰오 감독) 촬영 대본
  • “게이샤의 삶”(1951년, 요시무라 고자부로 감독) 촬영 대본
  • “벌거벗은 섬”(1960년, 신도 가네토 감독) 포스터

제6장 일본 영화의 새로운 경향: 1960년대 이후 [전시실 로비]

1960년대부터 일본 대부분의 가정에 텔레비전이 보급되었고 또한 사람들의 오락 형태가 다양화되면서 산업으로서의 일본 영화는 전성기의 기세를 조금씩 잃게 되었고, 이 때문에 각 대형 영화사들도 제작 방침을 전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 새로운 영화 표현을 원하는 작가들이 등장하여 일본 영화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고 세대교체도 촉진했습니다. 1950년대 말부터 마스무라 야스조増村保造, 나카히라 고中平康, 오카모토 기하치岡本喜八, 사와시마 다다시沢島忠, 오시마 나기사大島渚를 비롯한 신세대 감독들이 대두했고, 또한 대형 회사의 스튜디오에 속하지 않고 활약하는 감독이나 스태프도 등장하여 일본 영화도 지금까지의 오락관에서 벗어난 다양화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제7장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

일본 애니메이션은 지금 세계의 여러 곳에서 소개되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 뛰어난 수준이 하루아침에 획득된 것은 아닙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역사는 191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습니다. 3명의 개척자들이 각각 시도했던 ‘만화영화漫画映画’로 시작하여 컷아웃 애니메이션切り絵アニメーション이나 셀cell기술의 도입, 그리고 그림자극 애니메이션影絵アニメーション을 만드는 작가도 나타났는데, 제2차대전 후에도 개인이나 소규모 그룹 제작에 의한 시대가 지속되었습니다.

그 후 커다란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대형 극영화회사인 도에이東映가 1956년에 설립한 도에이 영화(현, 도에이 애니메이션東映アニメーション)의 등장이었습니다. 이로써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로의 길이 열려 산업으로서의 애니메이션이 꽃을 피웠습니다. 이런 발전 속에서 여러 유능한 인재가 배출되었고 극장용 작품 외에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의 융성과 함께 일본은 ‘애니메이션 대국’으로의 길을 걸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한편에서 개인 제작에 의한 예술적 애니메이션은 1950년대에는 오후지 노부로大藤信郎가 고군분투하는 상태였는데, 그 후에 인형 애니메이션을 특기로 삼는 오카모토 다다노리岡本忠成, 가와모토 하치로川本喜八郎등 여러 작가가 등장했고, 현재도 많은 작가들이 국내외에서 계속 활약하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영화의 태동

“나마쿠라 가타나(하나와헤코나이 메이토노 마키)”(1917년, 고치 준이치 감독) 상영 시간: 약 4분

오후지 노부로

  • 오후지 노부로 사진
  • “색채 만화가 만들어지기까지”(1937년, 오기노 시게지 감독) 상영 시간: 약 5분
  • “덴구 퇴치”(1934년, 오후지 노부로 감독) 포스터
  • 오후지 노부로 종이 작품
  • “유령선”(1956년, 오후지 노부로 감독) 그림자 그림 원화
  • 오후지 노부로가 직접 만든 셀화용 애니메이션 촬영대
도에이 애니메이션

  • “백사전”(1958년, 야부시타 다이지 감독) 포스터
  • “백사전” 그림 콘티 대본
    “아기고양이의 스튜디오”(1959년, 모리 야스지 연출) 그림 콘티 대본
  • “안데르센 이야기”(1968년, 야부키 기미오 연출) 캐릭터 인형
  • “꼬마 레미와 명견 카피”(1970년, 세리카와 유고 연출) 캐릭터 인형
  • “안데르센 이야기” 셀화
오카모토 다다나리

  • 오카모토 다다나리 사진
  • “홈 마이 홈”(1970년, 오카모토 다다나리 연출) 상영 시간: 약 4분
  • “홈 마이 홈” 페이퍼 크래프트